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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가 벗겨진 벽은, 이성복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시인은 위대합니다. 싱크대 기름때와 벽을 닦을 때 짜증낸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벽지가 벗겨진 벽 사이로 흔들거리는 못을 봤어도 못의 흘린 피를 상상하지 못했겠죠.
벽지가 벗겨진 벽은 상처받은 우리의 모습일는지 모릅니다. 거친 세월을 사느라 여기저기 찢기었을 겁니다. 그러나 더욱 큰 상처는 가슴 속 더 깊은 곳에, 아무도 볼 수 없는 핏자국이 남겨져 있을 테지요.
그러면서도 또 다른 시련들을 견뎌왔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아도 그 상처의 존재를 알아보는 시인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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