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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좋은 시구절, 옷보다 못이 많았다 박준 시인

by ∝♧ 2021.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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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보다 못이 많았다 -박준

 


그 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가슴이 시려옵니다. 양력이 월세살이 하는 사람에게 다행스러웠다는 지점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사방이 캄캄해진 밤은 신들마저 떠난 방은 지독히도 외롭습니다. 가난한 시절의 집엔 못이 참 많았지요. 왜 그렇게 못이 많았을까요. 그 집에 들어오고 나간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필요에 의해 박아둔 못들이었을까요. 번지르한 옷장 하나 없이 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의 짐을 옮겨주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집의 오래된 선풍기를 고쳐줍니다. 양장으로 된 책이 있던 두번째 집은 부잣집이었을까. '나'는 그 책을 훔칩니다. 책이란 여유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의미일 겁니다.

밝고 따뜻한 집에서 밥 한 두 주걱 더 먹어 배가 불러도 얹히지 않는 편안한 봄밤이기를, 신들이 떠나지 않는 곳에서 '나'도 위로받으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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